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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변화를 한 백령도를 다시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못 다한 이야기" 말고 "잊혀진 이야기" 한 토막 들려드릴 께요.
70년초 제가 근무하던 시절, 백령도에는 면 사무소가 있는 '진촌' 언덕배기에
자그마한 성당과 자그마한 병원이 있었습니다. 또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를 포함 해
마을에 한 채씩 모두 13채의 공소가 있었습니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가톨릭 교회라는걸 잘 아시겠지요?
생업에 바쁘고 본당이 먼곳의 신자들을 위해 순회 교회로 공소를 만든것이지요.
진촌 본당의 주임 신부는 케네디 대통령과 하바드 동창생인 어드워드 머피(가명)신부가
봉직하고 있었고 케네디 대통령의 동창이라는 배경(?)으로 급한 환자가 생기면
오산 공군기지에서 구조 헬기가 환자를 실어내갈 정도였지요.
6.25 직후 황해도 피난민들이 몰려든 작은 섬에 머피 신부는 본국으로 부터 막대한
구호 자금과 물자를 지원받아 백령도에 병원을 세우고 13곳에 순회교회를 세우며
섬주민 전체를 가톨릭 신자화 했습니다. 전마선으로 노저어 다녀야 하는 바닷길의
대청도 와 소청도에는 소형 동력선으로 순회 진료를 다닐 정도로 백령군도(?)의
제왕이 되었습니다.
머피 신부는 인상이 우리네 시골 아저씨와 구별이 안될 정도로 완전 현지화
되었고 이마을 저마을 백일 또는 생일 잔치상 머리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곤 했습니다.
이분을 처음 만난것은 소인이 중대장 시설, 지역사령관이라고 잔칫집에 초대를 받아
갔었던 때였습니다.
머피 신부가 백령도에 봉직하게된 동기는, 이 분이 "대 지" 라는 소설을 쓴 '펄벅' 여사처럼
중국과의 인연때문이 었습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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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대만으로 도망가고 중국 본토는 "중공"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머피 신부가 추방당하여 온 곳이 한국이었고, 그는 중국과의 인연을 그리워하여
중국이 가장 가까운 백령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고문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왜 중국을 그리워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았았습니다.
신부는 전에 봉직하던 곳에 정을 두면 않된다고 들었습니다. 새로운 임지에
전념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신자들도 떠나간 사제를 그리워하거나 찾아다니는
일도 없겠지요. 새로운 사제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어느날 병원에 진료차 아주머니 한분이 대청도에서 건너 왔습니다.
불행하게도 갑짜기 날씨가 사나워져 이 대청도 아주머니는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여인숙에 머물 사정이 못되어 사제관 빈방에서 하룻밤을 묵었겠지요.
이 아주머니가 돌아간 후 머피신부는 환속하여 서울로 나왔습니다.
백령도 주민들이 이 과부 아주머니를 얼마나 원망하였겠어요?
사람들은 그렇게 합리화를 합니다."신이 역사하시는 인간사" 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사목하던 백령도를 뒤로 하고 서울로 떠나는 그의 심경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머피신부는 서울의 어느 가톨릭 미션 병원에서 일하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소식을 들은
백령도 주민들은 서울로 달려와 머피신부를 전통 상여 위에 어버이로 모시고
장지로 떠났습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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