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라는 사람이 지난해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여하여 나이 칠순의 노인이 경찰 저지선을 넘어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넘어지는 장면을 보았다.
국가를 유지 하는데 는 국가 방위(防衛)를 해야 하고, 치안(治安)을 유지해야 하고, 국민이 함께 살기위한 법치(法治)가 되어야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經濟活動)을 해야 하고, 사회 보장(社會保障)이 되어야 하는데 특히 치안을 유지하는 데는 공권력 행사를 인정해야 하는데는 미국과 너무나 비교가 된다.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의 공권력에 저항하다 죽은자를 잘 잘못을 무시한 채 열사라고 부르는 한국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
백남기가 참가한 집회의 목적은 위키백과에서: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 (노동개혁, 청년실업 등),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소홀, 농민문제, 빈곤문제 등에 항의하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여러 단체에서 2015년 11월 14일 개최한 집회 시위를 말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사용 된 기사의 용어를 보면 “물대포” 라는 표현을 많이 써서 국민이 느끼기에 굉장히 무자비한 경찰 진압으로 표현하기 위한 용어로 보인다. 물대포라고 하고 물리적으로 전쟁에 사용하는 대포를 연상하게 해서 듣기에 좋지 않다.
각종 매체는 무조건 적 정부를 비판/비난 하늘 기사를 내지 않으면 국민들은 어용 언론이라 하기 때문에 정부와 관련한 모든 일에는 먼저 비판부터 솥아 내고 보는 것이 유행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것인가?
많은 언론이 사망한 백남기씨를 “~농민”이라는 붙이는 것이 하도 이상해서 오늘 찾아보았더니 아래 “생명과 평화 일꾼 백남기농민 약력”이라는 기록을 보면 실제 농사를 지은 때는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단지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것뿐인데 왜 백남기 농민이라 하는가?
국어사전에서 농민(農民): [명사] 농사짓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데모꾼을 농민으로 표현 하는것에 대하여 언론이 바른 표현을 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미국과 서구 민주주의를 보고 배워 옛 날에는 일인(임금 님)이 통치하던 방식에서 현재의 민주주의로 발전 해 왔는데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진정으로 국가 전체를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고 정치인과 반정부 활동하는 사람들에 필요한 민주주의로 변형 된 것이 매우 불만이다.
미국이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도 경찰이 설치한 통제 선을 위반 했을 때는 사살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경찰 제지 선을 뚫고 들어와서 경찰을 비웃는 행동을 하는 자를 영웅시하고 말을 비뚫어지게 하여 법을 조롱하는 자가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바르게 유지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생명과 평화 일꾼 백남기농민 약력
Posted 2015.11.17 22:07
1947년 8월 24일(음력) - 전남 보성군 웅치면 출생
1963년 2월 - 광주서중학교 졸업
1968년 2월 - 광주고등학교 졸업 (17회)
1968년 3월 - 중앙대학교 행정학과 입학 (68학번)
․ 군복무
1971년 10월 - 위수령 시 시위혐의로 1차 제적
1973년 10월 15일 - 교내에서 유신 철폐 시위 주도
1974년~1975년 - 수배 중 명동성당에 피신
1975년 - 전국대학생연맹 가입 및 2차 제적
갈멜 수녀원 잡부 1년
일흥농원 포도원 1년
갈멜 수도원 수도사 3년
1980년 3월 - 복교
1980년 - 어용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 역임
1980년 5월 8일 - 박정희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 주도
1980년 5월 15일 - 서울의 봄 때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 주도 (흑석동 캠퍼스에서 서울역까지 도보 행진)
1980년 5월 17일 - 군부 계엄 확대 조치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
1980년 7월 30일 - 중앙대학교 퇴학 처분(3차 제적)
1980년 8월 20일 -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 선고
1981년 3월 3일 - 3‧1절 특사로 가석방
1981년 - 고향 보성으로 귀향(수도작, 낙농업, 밭농사 등)
1981년 11월 - 박경숙(율리아나)님과 결혼
1983년 -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
1986년 - 가톨릭농민회 가입
1987년 -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회장
1989년~1991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
1992년~1993년 -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1992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준) 주도
1994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
2014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 동지회 회장
2015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
2015년 - 부인 박경숙(율리아나)님과 슬하에 1남 2녀
2015년 - 11월 민중총궐기 대회 행사 중 폭력경찰의 살인적인 물대포에 의해 쓰러진 후 의식불명,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투 중
|
2016년 10월 7일 금요일
백남기가 왜 농민인가?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